
유월절 유래를 잘 알지 않습니까? 노예가 된 이스라엘을 건지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열 재앙을 하나하나 드러내며 이집트 신들을 박살내고 심판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집트를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른바 해방, 혹은 구원이라 말하는 땅 옮기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권능을 드러내는 마지막 표적은 놀랍게도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집트인 사이에 경계를 두셨습니다. 그 표지가 다름 아닌 문과 기둥에 바른 피 흔적이었습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장자는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가 집 문기둥에 피를 발라두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양을 비롯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사이 죽음의 천사는 피를 보고 이스라엘 집은 건너뛰었습니다. 여기에서 유월절(Passover)이란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 유월절이 신약에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유월절 시기와 맞물린 예수님 고난을 보십시오. 특히 십자가를 지신, 그 고난 과정을 주목하십시오. 세 절기 중 유월절은 식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음식 자체가 다르고 먹는 방법 역시 다릅니다. 더구나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예배 진행도 새롭습니다. 다행히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눈 유월절 식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소위 다락방 만찬으로 부르는 그 예배 과정을 보십시오.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짖던 기도를 보십시오. 유월절 신학과제는 대속(代贖)에 있습니다. 그 신학 명제가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십시오. 그러니 유월절의 신약 성취는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신학 및 종교 연구
물론 오순절의 신약 성취 여부 역시 선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사도행전에 아예 오순절 날이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행 2:1)? 예루살렘 교회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그리고 성령 역사가 어떻게 뿌리내렸습니까? 사도행전을 살피면 자연스레 오순절의 신약 성취도 보입니다. 문제는 초막절 혹은 장막절입니다. 과연 초막절은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아니면 성취될 과제로 여전히 남아있습니까? 구약 절기가 신약에서 성취되었나를 살피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3대 절기는 모두 성회, 곧 거룩한 예배와 연관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가장 소중한 일이 성막 건축입니다. 성막을 짓고 봉헌하며 예배는 제사장 중심으로 확립됩니다. 그러니 절기 역시 성전에서 다룰 예배 소재입니다. 절기를 성전예배로 진행하자면 전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절기용 성경이 구별됩니다. 아는 분도 많겠지만 구약성경에는 절기용 성경이 따로 있습니다. 이른바 "메길로트"라 부르는 성문서 뭉치입니다.
유월절에는 "아가(Song of songs)"를 불렀습니다. 오순절에는 "룻기(Ruth)"를 읽고 초막절에는 "전도서(Ecclesiastes)"를 읽었습니다. 이들 절기용 성경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모두 솔로몬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물론 룻기에는 솔로몬은 흔적조차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이란 이름에 솔로몬이 내포되었다고 봄이 맞습니다(룻 4:22). 마찬가지로 아가와 전도서 자체에 솔로몬이란 이름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 성경 모두 저자가 솔로몬임을 은근하게 드러냅니다.
절기용 성경이 확정된 시점은 아무래도 성전건축 이후입니다.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물론 성전건축 이전부터 세습직 성가대는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성가대는 성전건축 이후 찬양을 위해 부지런히 노래를 수집합니다. 제일 과제는 시편이겠지만 절기용 성경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그들이 절기용 성경으로 룻기와 아가, 그리고 전도서를 내세웁니다. 이는 그 성경들이 절기 의미를 제대로 살렸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오순절이 이방인 구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됨을 담아냈습니다.
사실 유월절과 오순절은 신약 성취를 설명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과연 언제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이 난제를 풀어가려면 세 절기를 언급한 성경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출애굽기를 지금 당장 펼쳐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 절기들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출애굽기와 짝을 이룬 신약성경이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십시오. 혹시 모세 모형론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 대비해서 기록했다는 이론입니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연구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이론입니다. 두 복음서가 모두 모세 모형론에 근거한 접근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출애굽기 모형론으로 바꿔 부르기도 합니다. 자, 관건은 요한복음에 초막절 성취가 나오는가입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
제시된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주신 소명은 한 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을 예배자로 훈련하는데 자그마치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요단강을 건너게 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끈 지도자는 모세가 아닌 여호수아였습니다. 여호수아에게서 예수님 그림자를 볼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만큼 영적 안목이 탁월하다는 뜻이니 칭찬으로 이해하십시오.
그런데 이 약속과 소명에서 절기 연관성을 찾아보십시오. 유월절과 오순절(=맥추절)은 약속과 관련됩니다. 그러면 초막절은 어떻습니까? 초막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신앙도 달라집니다. 초막절을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그 성격상 곡물 수확 후 저장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곡물을 거두어 저장했다고 보면 수장절입니다. 그 후 다시 광야로 나와 초막을 지었다면 초막절(=장막절)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수장절을 고집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초막절 핵심은 곡물을 저장한 그다음 아닙니까? 유월절과 오순절은 사는 생활 현장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초막절은 반드시 집에서 나와야만 지킴이 가능해집니다. 한 주간 살아야 할 자리가 집이 아닌 광야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초막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초막절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초막절, 그 진짜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곡물을 저장하고 광야로 나올 수 있는 믿음이 본질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왜 광야로 굳이 나와야 하는가입니다. 아니 그보다 광야에서는 무엇이 중심이어야 합니까? 통상 광야는 생존하기가 버겁고 힘겨운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왜냐면 광야는 그들에게 단순한 생존, 그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광야는 생존을 넘어 생명으로 이어지는 영적 공간이었습니다.
초막절은 광야 40년을 떠올리는 추억팔이가 결코 아닙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채워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절기를 지키라 명받았습니까? 모세가 계명을 받은 그 시점 아닙니까? 더구나 세 절기를 성회로 지키라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은혜가 세 절기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문제는 40년 내내 초막에서 살다 보니 무디어진 영성입니다. 돌아보면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관건은 그들이 지닌 영성입니다. 아쉽게도 신앙이 어디로 기울었는가에 따라 생명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1세대 이스라엘은 대다수가 낙오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초막절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가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는지, 그 여부에 따라 생명 의미가 달라집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는 과거에 근거합니다. 또한 오순절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은혜의 땅, 곧 미래에 근거합니다. 반면 초막절은 광야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현재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며 지켜주시는 임마누엘 역사입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 현존을 의식하느냐 못하느냐입니다. 다시 말해 초막절은 온전한 예배,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 그 자체가 곧 초막절 성취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지면이 한참 길어진 관계로 짧게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란 말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성막을 떠올리셔도 괜찮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한복판에 세워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이신 예수님도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습니다. 우리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을 가리킵니다(요 1:13).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하는 믿음이 곧 초막절을 지키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초막절은 어떻게 예배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초막절은 예배하는 현재, 곧 영원한 현재와 맞물려 있습니다. 따라서 초막절을 지키는 자라면 반드시 이렇게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 현존을 생생하게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으십시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