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탄불의 한 찻집에서였다. 김이 오르는 차이(TEA) 잔을 사이에 두고, 중년의 무슬림 이웃이 내게 물었다. "당신들의 하나님과 우리의 알라가 정말 다른가?" 나는 되물었다. "저 하늘의 별들이 우연히 거기 걸렸다고 믿으십니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알라께서 지으셨지." 그 순간 우리는, 갈라진 두 신앙의 한복판에서 뜻밖의 한 지점에 나란히 섰다. 이 우주가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진정한 대립 구도는 '창조 대 진화'가 아니라 '창조 대 우연'이어야 한다
먼저 오해를 걷어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창조와 진화를 물과 기름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구도는 절반이 틀렸다. 우주가 젊은지 오래되었는지, 생물이 변화를 겪었는지 아닌지는 신앙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니다. 서울대 우종학의 지적처럼, 하늘의 움직임을 중력으로 설명했다고 '유신 중력'이라 부르지 않듯, 자연의 과정을 밝혔다고 신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과학은 '어떻게'를 다루고, 신앙은 '누가'와 '왜'를 다룬다.
진짜 갈림길은 '기원'이다. 생명과 정보와 질서가 인격적 지성에서 나왔는가, 맹목적 우연에서 나왔는가. 여기서는 타협이 없다. 둘 중 하나다. 설계자가 있거나, 없거나.
정보는 우연히 태어나지 않는다
애국가 첫 소절을 떠올려 본다. 원숭이가 자판을 두드려 그 열여섯 글자를 우연히 만들 확률은, 우주의 나이 138억 년을 다 써도 0에 수렴한다. 물리학자 제원호의 비유다. 애국가 한 소절도 그러한데, 세포 하나에 담긴 유전 정보는 백과사전 수천 권 분량이다.
경희대 유전체학자 이화진은 그 유전체 안에서 정보를 보호하고 복구하는 지능적 시스템을 발견한다. 오타를 잡아내는 교정 장치가 세포에 이미 설계되어 있다. 한동대 김아람의 증언도 나란하다. 진화의 증거로 꼽히는 대장균 실험에서도, 새 유전자가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존 정보가 재배열된 것이었다. 무작위로 놓인 DNA에서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새 유전자가 처음부터 만들어지는 과정은, 그 최종 결과로 보이는 것만 있을 뿐 실제 생성 과정 전체가 관찰된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여기에 이 시대의 역설이 겹친다. 백석대 강윤희가 짚었듯, GPT와 알파폴드 같은 인공지능조차 인간 엔지니어의 정교한 설계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지성 없이는 지능이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도 흉내 내기 벅찬 것이 DNA라는 생명의 코드다. 더 깊은 역설이 있다. 진화를 논증하는 그 정연한 지성 자체가 순전히 우연의 부산물이라면, 우리는 그 논증을 왜 신뢰해야 하는가. 지성을 부정하는 논증조차 지성을 전제한다. 이것이 유물론의 자가당착이다.
이슬람도 우연을 거부한다 — 그러나 갈라지는 지점
여기서 흥미롭게도 이슬람은 창조 신앙에서 기독교와 놀랍도록 가깝게 선다. 꾸란은 알라가 하늘과 땅을 엿새 동안 지으셨다고 말한다. 창조의 방식은 단호하다. "쿤 파야쿤", 곧, "있으라 하시니 있었다"이다. 무(無)에서 명령 한마디로 존재가 솟는다. 알라의 아흔아홉 이름 가운데 '알칼리끄(창조자)'가 있고, 아담은 흙에서 직접 빚어졌다고 전한다. 그래서 무슬림 세계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거부가 기독교권보다 오히려 더 완강하다. 이슬람교 측에서 하룬 야흐야 같은 이가 반진화론 운동을 크게 일으킨 것도 이 토양에서다. 무슬림 이웃과 마주 앉으면, 창조주를 부정하는 무신론에 맞서서는 우리는 늘 같은 편에 선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이슬람의 창조주는 초월적

의지요 절대 주권이다. 그분은 명령하시나, 자신을 닮은 존재를 짓지는 않으신다. 이슬람 신학에서 인간은 알라의 종(abd)이지, 그 형상(Imago Dei)이 아니다. 알라는 어떤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 반면, 성경의 창조주는 사람을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흙덩이에 친히 숨을 불어넣어 관계 안으로 부르신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알라가 '지으시는' 분이라면, 성경의 하나님은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창조가 명령의 사건이냐, 아니면 사랑의 사건이냐. 이 물음이 두 신앙의 심장을 가르는 핵심적인 차이다.
살아계신 창조주를 현장에서 만나다
창조주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말로만 아는 창조주가 있고, 몸으로 만난 창조주가 있다. 수년 전에 어느 무슬림 청년이 기억난다. 그는 알라를 두려워하되 사랑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가 아는 창조주는 저 높은 곳에서 심판하는 분일 뿐, 자신의 이름을 아는 분은 아니라고 여겼다. 나는 그와 오랜 시간을 이야기했다. 특별한 논증이 아니었다. 다만 나를 지으신 분이 나를 아신다는 것, 머리카락 수까지 세신다는 것, 그 창조주가 나를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것을 나누었다. 어느 날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를 만든 분이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습니다." 그날 나는 보았다. 창조 교리는 논쟁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오랜 기간 중동의 밤하늘 아래에서 수없이 별을 올려다보았다. 이슬람의 땅에서 쏟아지던 그 별들을 보며, 나는 한 번도 저것이 우연히 걸렸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 너무 정연하고, 너무 아름다웠다. 우연은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별을 지으신 분이, 별 하나보다 사람 하나를 더 귀히 여기신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매번 무릎이 꺾였다.
편지를 받아 든 사람
창조를 인정하지 않은 이들은 사실, 이에 대해 깊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는 일은 절대로 이성을 접어 두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을 끝까지 밀고 간 자리에서 마주하는 결론이 되어야 한다. 정보의 기원을 묻고, 복잡성의 뿌리를 캐고, 지성의 근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결국 한 얼굴 앞에 선다. 이 모든 것을 지으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신 그분의 얼굴이다.
무슬림도, 기독교인도, 무신론자조차, 실은 같은 편지를 받아 든 사람들이다. 밤하늘이라는 편지, 세포라는 편지, 자기의 존재라는 편지다. 여기에서 물음은 단 하나다. 이 편지를 쓴 이가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만약 있다면, 그분은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분인가, 아니면 내 이름을 부르시는 분인가. 나는 오랜 기간의 흙길 끝에서 후자를 만났다. 그분은 나를 지으셨고, 지으신 나를 아셨고, 아시는 나를 사랑하셨다. 이제 모두에게 묻는다: 언제까지, 이토록 정교하고 섬세한 사랑의 편지를 받아 들고도 그것을 쓴 이가 없다고 우길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