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로 칼럼] 허물

임이로

올 한 해도 겨울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코끝은 건조한 찬바람에 시큰거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짧아진 요즘. 한 해가 또 그렇게 떠나가는 것을 느껴본다. 겨울은 마무리 짓기 참 좋은 계절이다.

 

나는 내 생일이 있는 7월달이 되면, 일부러 한 살 더 먹는 마음을 연말이 오기 전부터 지레 먼저 먹는 습관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29살 7월에, 서른 살이 미리 되는 것이다. 

이러한 버릇을 가지게 된 이유는 내게 연말 같은 마음, 즉 ‘끝’을 남들보다 빠르게 직감하기 때문이다. 괜히 이별하는 마음을 일찍부터 먹는달까. 그리고 나선 자연스레 떠나는 마음을 준비한다.

 

이번에도 변함이 없다.

 

살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과 인연이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이는 연인과의 관계에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에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와의 이별보다, 사실은 ‘과거의 나’와 더 자주 이별해 왔다. 남보다 나이를 먼저 먹는 상상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과거의 나’를 마주하고 ‘새로운 나’로 살아가기를 마음먹는 일은 더 엄숙하고 지난한 과정이라서. 매년 여름, 나는 스스로에게서 피부 한 겹을 통째로 벗겨내는 뜨거운 고통에 시달린다.

 

한창 진로 고민을 하는 척, 인생을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나는 내 고등학교 은사님에게 찾아가, 엉겁결에 ‘대학원을 가야겠어요.’라고 말한 적 있다. 사실, 무심코 던져본 피상적인 시나리오 중에 하나였는데. 그때 선생님의 말씀에 내 인생의 허물이 그렇게 무너졌다.

 

“그래. 가서 미친 듯이 공부해 봐. 인생에서 그런 기회 몇 없어.”

 

그런데 그다음 말씀이 더 가관이었다.

 

“그리고 네 멋대로 살아봐. 대신, 크게.”

 

나는 그날 왠지 모를 설움에 북받쳐 엉엉 울었더랬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 한 마디가 내 안에 무언가가 끝나고 시작된 순간이었으니까. 그 뒤에 나는 서울로 상경했고 3년이 지나 이제는 대학원 과정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무리 단계가 한창 남았지만, 정말 미친 듯이 공부해 온 것 같다. 이제는 이 시절의 막바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그렇게 나는 대학원 과정 마무리를 반년을 남겨두고 또다시 지레 먼저 그 고통의 시간을 맞이한다. 지나온 것이 허무해지고, 집착하던 것이 쓸모없어지고, 행복했던 것이 부질없어지는. 이 허물을 갈기갈기 벗겨내는 고통의 시간이, 결국 다시 찾아온 것이다.

 

자주 만나던 사람들과는 흩어지며, 아주 가끔 마주치던 사람들과는 깊은 대화가 가능해지는 이런 시기엔, 바다가 범람하고 강물이 넘쳐흘러 내 얕은 숨을 앗아갈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너무도 쉽게 일렁인다. 하지만, 이 과정 끝엔 정말, 또 다른 죽음 같은 시작이 있음을 나는 이제 안다. 나는 지금, 그 절벽 앞에 서 있다. 이 길이 내비치는 목적지가 어딘지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허물 같은 시간을 벗겨내야 비로소 봄날이 찾아올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떠날 준비를 한다. 나를 붙들던 것들과, 아프게 한 것들, 그리고 나를 지탱해 준 모든 것들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그렇게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로운 나의 목소리를 향해 오롯이 귀를 기울이며. 허물을 그렇게 벗겨내는 중이다.

 

 

[임이로]

시인

칼럼니스트

제5회 코스미안상 수상

시집 <오늘도 꽃은 피어라> 

메일: bkksg.studio@gmail.com

임이로의 비껴서기 bkksg.com

 

작성 2025.12.12 11:01 수정 2025.12.1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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