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매일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 시즌이라 매일 새로운 다큐가 올라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개해 준 지인은 매년 기다렸다 집중적으로 보는데, 일 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승전결이 갖춰진 스토리 위주의 영화를 즐기는 저로서는 매끄럽지 않은 화면의 전환과 클라이맥스 없는 산발적인 전개 때문에 처음엔 다큐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자 궁금함이든 안타까움이든 마지막 크레딧까지 보게 만드는 여운의 힘이 확실히 강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는 ‘하와의 첫 문장’과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노 어더 랜드’는 특히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지금, 이 시각, 세계 어느 나라에선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억압과 차별과 야만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며칠 전 읽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퇴행에 대한 구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신에 대한 우상 숭배적 개념으로서의 퇴행이며 신에 대한 사랑을 소외된 성격 구조에 적합한 관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우상 숭배적 개념으로의 퇴행은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원칙이나 신념이 없으며, 그들에게 전진한다는 목표 말고는 아무런 목표도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텔레반은 여자학교에만 폭탄 테러를 하다 결국 다 폐쇄해 버렸습니다. 폭탄 테러로 다친 학생들에게 헌혈하기 위해 병원을 찾은 여학생들조차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지요. 여자의 피는 필요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로 태어나면 글도 배우지 못한 채 열두 살이 넘으면 모르는 남자와 조혼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민의 반인 여자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손 발을 묶어 버린 아프가니스탄의 미래가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퇴보라는 건 자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후퇴한 역사에 대한 대가는 결국 그 나라 국민의 몫이 될 터이니 편향적인 맹신을 주도하는 종교 지도자와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정치 집단의 폐해가 얼마나 무서운지 다큐는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에게 강제 철거당하는 한 팔레스타인 마을 이야기도 해피엔딩은 아닙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다큐 영화를 같이 만든 사람이 이스라엘 출신의 기자라는 사실입니다. 유발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팔레스타인과 친구가 되어 이스라엘 군이 민간인에게 행사하는 야비한 차별과 폭력을 알리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더러운 배신자라는 욕과 협박을 들어도 그는 자신이 두 눈으로 보고 직접 겪은 사실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분투하지만 혼자서는 힘에 부칩니다.
‘평화 인물전’을 쓴 김재신 박사의 책엔 상대편의 총에 자식을 잃었지만 함께 비폭력운동을 하는 이스라엘 출신과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버지들이 나옵니다. 한 인터뷰에서 유대인 자신들이 홀로코스트를 겪었으면서 어떻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그렇게 학대하고 억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이스라엘 운동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홀로코스트를 매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교육과 정치에서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갖 불행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사실 때문에 안전이 필요하다는 것은 민족적 강박이 되고, 결국 악을 성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책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절대적인 안전이 아니라 평화라고 주장합니다. 안전은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보이는 것이지만 평화는 전체적인 관점을 가져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굳이 거칠고 거북한 다큐 영화를 찾아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인 중심적인 관점에서 전체적인 관점으로 시야를 확대하는 작업은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편안함, 익숙함과 결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일단 눈을 감지 않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다양한 창작자가 만든 콘텐츠를 찾아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K People Focus 차경숙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함께성장인문학연구원 수석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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