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민주주의는 왜 ‘살 만한 삶’을 약속해야 하는가

이진서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2024, 문학과 지성사)에서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리크 보름스는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삶을 살 만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그 조건을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개인의 행복론을 넘어 민주주의의 정당성 자체를 다시 묻는다.

 

보름스는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죽음보다 더 나쁜 상태라고 규정한다. 몸은 살아 있지만 존엄과 의미가 붕괴된 상태, 곧 질적으로 파탄난 삶이다. 이때 민주주의는 단순히 생존을 허락하는 체제가 아니라 삶이 삶으로 경험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하는 제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여기에 상호의존성의 차원을 덧붙인다.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다.” 개인의 삶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서로의 취약성은 돌봄의 연대를 통해서만 지탱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절차 이기 이전에, 누구의 삶도 사회적으로 ‘살 만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지 않도록 지키는 '공동책임'이다.

 

여기서 돌봄(care)은 중요한 정치적 개념으로 부상한다. 돌봄은 더 이상 사적 영역의 선의가 아니다. 사회가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할 공적 인프라이다. 누군가의 삶이 질적 붕괴에 빠지는 것을 막는 안전망, 다시 말해 ‘살 만한 삶’의 최저선을 세우는 것이 민주주의의 책무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생존 이상의 것을 약속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정당한 민주주의는 다수의 선택만이 아니라 삶의 질적 조건을 지켜내는 최소 기준을 제도화할 때에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새로이 출범한 정권도 예외일 수 없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거창한 이념이나 이론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무게는 말뿐인 구호보다 한 사람의 삶이 더 이상 ‘살 만하지 않다’는 절망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상적 조건에 달려있다. 합법적인 절차로 권력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의 정당성은 오직 그러한 조건을 보장할 때에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새 정부를 이끌 이들이 부디 잊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냈던 우리 모두가 새겨야할 가장 간명하면서도 무거운 약속이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5.08.23 11:20 수정 2025.08.2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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